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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here is no spoon

매트릭스 안에서 주인공들의 잉여 이미지가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모두 번지르르한 가죽옷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네오만 거의 맨몸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선 왜 모두 가죽옷을 입고 있는지 아는 사람 있으면 좀 가르쳐 주기 바란다. 다음으로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점은 매트릭스 안에서 그들이 취하는 공통점이다.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나의 주관이다. 앞 장면 네브에서 매트릭스로 해킹해 들어갈 때에 모두 잠자듯이 눈을 감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매트릭스는 꿈나라이니 거기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꿈을 꾸어야 하고 꿈을 꾸려면 잠을 자야 하니 당연히 눈을 감아야 한다. 그러면 매트릭스에 들어와서는 어떻게 되는가. 오즈의 마법사를 다시 생각해 보라. 에메랄드 성의 찬란한 거짓에 속아서 그곳 주민들은 모두 에메랄드 빛의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임을 모르고 산다.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은 매트릭스의 허구에 속아서가 아니라 여기에선 반대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글라스를 씀으로써 매트릭스 안의 보통 사람들처럼 허구의 세계에 속지 않는 존재들이란 것이란 뜻이다. 이점은 주인공들이나 어쩌면 요원에게도 맞는 이야기가 되겠다. 또다른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보편적으로 납득될 것이다. Reflections. 세상 안에 있는 또다른 세상을 의미하는 이 테마는 영화에서 거듭거듭 사용된다. 그리고 반드시 매트릭스 안이나 컨스트럭트 같은 공간에서만 사용된다. 선글라스와 그것에 비친 Reflections를 보여 줌으로써 이들이 매트릭스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피어스. 리더 답게 폼나는 의상을 입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모피어스의 코걸이 안경은 한국인의 골상에 맞지 않으니 탐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피어스의 선글라스에서 유난히 Reflections가 강한 것은 주목해야 한다. 또 한가지가 있으니 바로 모피어스의 넥타이이다. 모피어스가 컨스트럭트나 매트릭스 안에 들어와 있을 때에는 녹색의 넥타이를 매고 있다. 바로 매트릭스의 색인 녹색의 넥타이.

트리니티. 오, 아름다우신 삼위일체시여. 역시 무얼 입어도 아름답다. 물론 아니 입으셔도 아름다우시다. 매트릭스 후에 주연한 영화 레드 플래닛Red planet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에 나도 꼴까닥 하였었다.

사이퍼. 가죽 중에서도 어떤 가죽옷을 입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는데 미안하게도 그 점은 알 수가 없다. 목걸이에 대해서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의 선글라스를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단서가 된다. 선글라스와 같은 작은 소품도 예사로운 것은 없다. 다른 대원들의 선글라스는 모두 타원형이다. 어떻게든 모난 모양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퍼와 요원이 쓰는 선글라스는 각진 모양이다. 기계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이 네모난 모양이 사이퍼가 변절자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에이팍. 별로 할 말이 없다. 그에 대해서 할 말은 오직 하나 뿐인데 Glitch in the matrix에서 나온다.

스위치. 혼자 흰 옷을 입고 있어서 두드러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왜 혼자 흰색 옷을 입을까. 스위치에 대해서도 그 이름이나 역할에 대해 내가 할 말은 하나 뿐이다. 이름 그대로 스위치Switch라는 것이다. 스위치가 흰색 옷을 입고 있을 때엔 매트릭스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즉 스위치처럼 현상태의 표시가 되어 주는 역할이다. 네오가 깨어나는 부분에서도 스위치가 흰색 또는 은색의 탱크톱을 입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마우스. 잠시 후에 보겠지만 오라클을 만나러 갔다 오는 동안 자리를 지키는데 심심할 테니까 가져온 것이 있다.

Morpheus: We'll be back in an hour.
영화가 끝난 후에 나오는 크레딧은 빼고 마지막 승천 장면까지 1시간 남았다. 못 믿겠으면 자신의 비디오와 DVD카운터를 잘 관찰해 보라.

Getting the bug out에서 나왔듯이 그들의 차는 1965년형 Lincoln Continental이다. Lincoln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쓰레기통 속으로 사이퍼는 몰래 핸드폰을 걸어서 던져 넣는다. 이것이 배신의 방법이다. 어디이든 약속된 번호로 걸었을 것이고 요원들은 이제 발신장소를 찾아 오게 될 것이다. 핸드폰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 네오가 사무실에서 도망칠 때에 건물 밖으로 떨어지던 핸드폰이 생각나지 않는가. 핸드폰을 버리면서 네오는 도망갈 의욕을 버렸고 사이퍼는 믿음을 버렸다. 버린 곳이 쓰레기통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도 본 적이 있다. 나중에 Sentinels attack에서 네오가 요원을 피해 다니다가 쓰레기장 속으로 떨어지는 장면과 상관해서 쓰레기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오라클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네오는 자신이 그동안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매트릭스에 이번엔 거짓임을 알고 다시 찾아온 느낌을 말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특수효과에 대해서 Revisited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 보기 바란다. 국수 이야기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 대한 영화업자들의 소위 오마주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기서도 창문에 네오의 모습이 비친다. Reflections. 네오가 하는 질문에서 보드리야르의 개념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
Neo: I have these memories from my life. None of them happened. What does that mean?
무슨 의미이냐는 질문에 굳이 답하자면 아무 의미도 없다. 스위치의 말처럼. Switch: It doesn't mean anything. 네오가 펼쳐 보였던 책이 말하는 것처럼 시뮬라크르로 가득찬 세상은 허무하며 모든 것은 진실하게 보일수록 더 무의미하다. 시뮬라크르. 파생실재를 이번엔 의문문의 모양으로 다시 제시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이 세계가 어린애 티를 내려고 하는 이유는, 어른들이란 다른 곳, 즉 실제의 세상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하여이며, 어른들의 유치성 그 자체가 실제 유치성을 환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여기서 어린애 흉내를 낸다. (시뮬라시옹, pp40-41, 장 보드리야르 저, 하태환 옮김, 민음사) 매트릭스는 왜 존재하는가.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숨겨야만 하기 때문에 매트릭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매트릭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즉 순환적이고 허무한 것이다.

Trinity: That the Matrix cannot tell you who you are.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또다른 허구들이 그들의 목적에 맞추어 나에 대해서 규정한다. 그러나 이제 허구의 한계를 벗고 우리 의식의 차원을 높일 때이다. 니고제로이치.

Neo: What did she tell you?
Trinity: She told me...
트리니티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하겠냐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트리니티의 망설임은 이유가 있다. 네오가 '그'인지 아직 모른다. 네오를 사랑하지만 만약 네오가 '그'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망설임 그리고 역설에 의한 예언의 성취를 나중에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매트릭스를 좋아하는 것 아니겠는가.

트리니티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오라클이 사는 아파트에 왔다.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지팡이 든 노인을 보고 모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노인도 답례하듯 끄덕인다. 이 장면은 짧게 지나가기 때문에 잘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까지 이 노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뿐이다. 일단 정확히 관찰해 보자.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있다. 노인의 생김새가 영화를 촬영한 호주의 원주민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한 의견은 호주 원주민의 토속 종교와 샤머니즘 등을 들어서 노인이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Wachowski형제는 1996년에 지금과 거의 같은 대본을 완성했는데 나중에 호주에서 촬영하게 될 것을 미리 알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오류가 있는 설명이다. 다음으로 노인의 차림새를 보자. 흰 셔츠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맨 완전한 정장이다. 장소가 좀 지저분해서 얼핏보면 노숙자 거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노인은 의자의 세 자리 중에서 가운데에 앉아 있다. 노인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맹인용 흰색 지팡이이다. 그렇다면 노인은 맹인이라는 것인데 어떻게 모피어스가 목례하는 것을 알아보고 답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점들을 확인했으면 모피어스와 노인의 동작을 살펴보자. 분명히 모피어스는 노인을 향해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노인도 답례하듯 고개를 움직인다. 마치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노인 뒤쪽 벽에 그려진 낙서는 마치 사천왕의 눈처럼 느껴진다.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이 장면에 대해서 그래도 설득력 있는 세 가지 설명이 Observations about the movie The Matrix에 있었다.

테이레시아스(티레시아스)Teiresias(Tiresias)인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이레시아스라는 설명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신들에 의해 눈이 먼 테베(테바이)의 예언자이다. 이야기에 의하면 테이레시아스가 눈이 먼 것은 신들의 불사不死하는 비결을 공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테이레시아스가 신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은 꿈을 통해서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죽은 후에 저승에서 오디세우스를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수호자Guardian인가? Jan Biel의 설명이다. janbiel@talknet.de
노인이 장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개 숙여 인사한 것은 분명히 의식적인 것이다. 어쩌면 노인도 오라클 같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노인은 엘리베이터 앞에 눈먼 노숙자처럼 앉아 있지만 사실은 오라클을 지키는 수호자일 것이다. 하지만 Reloaded에서 이 가설은 틀린 것으로 판정나 버린다.

암호Access Codes인가? the Gruamach의 설명이다. gothcop@stlnet.com
우선 오라클의 정체에 대해 AI중에서 인간을 편들어 반란하였다는 설이 있다. 만약 오라클이 시온을 편들어 반란한 AI라면 오라클을 숨길 필요가 있고 그래서 모피어스와 노인 사이에 인사를 교환하는 것은 들어가도록 허락받는 암호일 수도 있다. 문지기라는 설명과도 비슷하긴 하다. 오라클이 바로 시온의 메인프레임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온의 메인프레임과 매트릭스는 연결되어 있고 모피어스와 노인이 교환하는 것은 시온의 메인프레임으로 통하는 암호인 것이다. 노인은 그 암호를 확인하는 역할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오라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퍼도 거기까지 운전하고 갔으니 그 건물을 알고 있고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요원들에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피어스를 넘겨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그 노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대충 이렇다.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장님Blind man이라고 적고 있는데 전체와 연결할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작은 재치를 부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라클이 어떻게 그 아파트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Reloaded에서 밝혀질 것이다.

모피어스와 네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 대해서는 의미는 많지만 나중에 실현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점은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특히 이 말.
Morpheus: Try not to think of it in terms of right and wrong. She is a guide. She can help you to find the path.
그밖에 네오의 옆 벽에 KYM이라고 세로로 새겨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영화의 의상을 디자인한 Kym Barrett의 이름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리고자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비슷한 것으로 나중에 Dodge this에서 Brown 요원의 모습으로 나오는 헬리콥터 조종사의 이름표에 KIM이라고 적혀 있는데 의미는 아직 알 수 없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데리고 오라클의 아파트 문앞까지 왔다. 여기서 하는 말은 앞서 Morpheus / Neo matchup에서 모피어스를 네오가 이겼을 때에 해주었던 말이다.
Morpheus: I told you I can only show you the door. You have to walk through it.
네오가 문을 열려고 손을 가져가는 순간. 손잡이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Reflections. 네오의 손은 문을 막 열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Dew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겠다. 문은 인생에서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문은 인생의 새로운 기회와 상승을 상징하며 내면적으로는 미지의 영역으로의 초대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문은 안전과 불안전의 사이에 있는 길을 상징한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정을 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문은 선택과 결정의 상징이다. 초이와 두주어가 나이트클럽에 같이 가자고 할 때에 네오는 문가에서 잠시 망설인다. 아담스가에서 차에 탔으나 금방 확신이 서지 않은 네오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으나 트리니티가 설득하여 다시 들어온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그들은 문지기야. 그들이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들과 싸워야 한다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네오가 문을 연 303호에는 요원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선택은 직접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스파링 프로그램에서도 말하고 오라클의 아파트 앞에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 네오가 오라클의 아파트에 왔을 때에 문을 열기까지 망설임이 손잡이에 비쳐진 모습으로 확대되어 있다. 그런데 네오가 결심하고 손을 대자 마자 문은 저절로 열린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사제라고 칭하는 것이 좋겠다. 신탁을 받는 델포이의 신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샤머니즘적인 무당은 아니겠지만 접신의 상태에서 신의 말씀을 직접 듣는 즉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에게 내려진 신의 계시는 모호하고 신비적이서 이를 다시 사람들에게 쉽게 해석해 주는 사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라클이 진짜 계시를 받는 사람 혹은 예언을 하는 사람에 해당하므로 문을 열어준 여자는 사제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런데 모피어스가 선글라스를 언제 벗었는지 본 사람 혹시 있는지 모르겠다. 사제가 말한다. Priestess: Hello, Neo. You're right on time. 제때에 안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때라니 무얼 기준으로 말하는 걸까. 쿠키가 다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네오는 쿠키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쿠키에 대해서는 아파트를 나오기 전에 다시 설명하겠다.

거실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피어스가 기다리는 벽에 있는 시계를 보라. 태양이 작렬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태양은 빛이고 성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간접적으로 빛이라고 칭하고 있다. 간단한 소품이지만 네오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라클의 아파트에는 상징들이 풍부하다. 거실로 들어가는 벽과 가구에는 금색 은색의 식기들이 많이 놓여져 있다. 화면 왼쪽에는 컵과 주전자로 보이는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이 오른쪽 벽에 있는데 바로 금색의 숟가락이다. 잘 보지 못했으면 천천히 잘 보라. 벽에 무슨 장식품처럼 걸어 놓은 것은 금색의 스무 개, 서른 개는 됨직한 숟가락들이다. 아이들이 있는 거실 벽에는 역시 태양처럼 둥근 부조판이 세 개가 있다. 그런데 정지화면으로 잘 보면 오른쪽의 하나는 모양이 선명하지 못하다. 거실엔 '그'의 후보인 아이들이 있다. 초능력을 지닌 아이들은 아키라를 연상시킨다. 체스를 두고 있는 아이도 있고 노트북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아이도 있고 한자로 이름이 적힌 책을 읽고 있는 아이도 있다. 이 한자로 적힌 것이 무엇인지 읽지를 못하고 있다. 내가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단서이다. 두 여자 아이가 장난감 블록을 공중에 띄우면서 놀고 있다. 초능력자인가 보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텔레비전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는 것은 Night of the lepus라는 1972년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토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테마가 또 나온 것이다. 이 영화는 실험 중 돌연변이되어 거대해지고 육식성이 된 토끼 때문에 한바탕 재앙을 겪는다는, 요즘 비디오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괴물 영화이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아리조나의 토끼 농장에서 질병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대학에 맡겼는데 실험중 연구원들이 주입한 호르몬 때문에 토끼들이 집채만큼 커지고 육식성이 되어서 사람과 가축을 마구 잡아 먹고 번식하는 재앙이 벌어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줄거리처럼 그렇게 단순히 볼 영화는 아닌 것 같다. 한국에 사는 나로서는 더이상 알 수 없지만 미국에서도 비디오 출시조차 되지 않은 이 영화는 제작기법의 조잡함과 스토리의 기괴함 때문에 일반으로부터는 웃기고 촌스런 옛날 영화라는 비웃음을 받고 있는 한편 바로 그 점 때문에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작 소설이 있고 그건 오히려 말이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영화를 만들었는지 영화에는 말도 안되는 웃기는 짬뽕 투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병에 걸린 토끼를 연구해 달라고 대학에 맡겼는데 연구를 맡은 것은 곤충학자들이란다. 거대한 괴물 토끼이지만 애완동물용 토끼의 모습을 커다랗게 확대한 것이라서 괴물처럼 묵직한 동작은 찾아볼 수 없고 핏자국 대신 케첩을 입에 바르고 달리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 보다는 귀엽다고 한다. 에너자이저Energizer 건전지의 광고에 나올 만큼 힘이 넘치는 토끼들은 천지를 어지럽히는데 그 일으키는 사건이란 것이 록그룹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콘서트장에서 주최측이 준비한 이벤트인 것처럼 드라이 아이스의 안개 속에서 등장한다던가 하는 것이다. 하여튼 괴물이 나타났으니 재앙은 재앙이다. 그래서 추적해 보니 그곳의 오래된 탄광에서 발생한 것인데 그 탄광의 모습이 토끼굴과 연결지을 수 있겠다. 주인공들이 토끼굴로 돌아다니는 장면도 있는 것 같다. 결국 사태는 심각해져서 주방위군이 출동하여 해결된다고 하는데 정확히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배우들의 대사나 연기가 저급한 것을 초월하여 넌센스라고 하며 거대한 토끼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미니어처 세트도 엉성하여 도대체 영화를 만든 사람의 정신 상태가 어떤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검색 결과가 결코 적지 않다. 한국인으로선 더이상 알 수 없지만 Wachowski형제는 이 영화가 오라클의 아파트에서 보여질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삽입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Begin The Run이란 음악도 매트릭스 어딘가에 사용되고 있다. 오라클의 거실 TV에 나오는 장면은 집채만큼 커다란 토끼들이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그리고 옆에는 가장 중요한 스푼 보이가 유리 겔라처럼 숟가락을 휘면서 놀고 있다. 잠시 이정우 교수의 저서 기술과 운명을 읽는 사람을 위하여 저서에 나오는 사진에 붙은 글귀를 설명하겠다.그림 13. 본래무일물 하처유진애. 이것은 육조단경 권상 7에 있는 육조의 게송이다. 육조단경은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전후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 장면의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휘어지는 숟가락에 네오의 모습이 비친다. Reflections.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스푼 보이는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가르쳐 준다.
Spoon boy: Do not try and bend the spoon. That's impossible. Instead, 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Neo: What truth?
Spoon boy: There is no spoon.
Neo: There is no spoon?
Spoon boy: Then you'll see that it is not the spoon that bends, it is only yourself.
네오와 트리니티가 모피어스를 구출하기 위해 정부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폭탄을 터뜨리기 직전에 뜬금없이 내뱉는 이 말. There is no spoon. 여기에 시뮬라크르의 허구를 간파할 불교의 진리가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육조단경의 앞에 말한 부분에서 조금 더 나아가 11에 바람에 움직이는 깃발에 대하여 육조가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There is no spoon과 같다. 나는 여기서 그 대목을 옮겨 적지 않을 것이고 설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든 것을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여태껏 잘난 척 많이도 늘어놓았지만 사실 내가 이해하고 깨달은 것은 하찮다. 여러분이 직접 단경을 찾아 읽어 보고 직접 의미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백번 낫다. 부디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러고 나면 잘난 척 떠는 내 글은 더이상 굳이 읽을 필요도 없게 되고,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 떠는 내 글을 그저 스포츠 신문의 유머처럼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사제가 부르니 이제 오라클을 만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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